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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믿음 바른신앙

Total 188건 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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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y 31, 2023 베드로의 닭이란?
    제가 사는 지역의 이름은 ‘Oviedo(오비도)’라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의 유래는 아마도 스페인의 어느 시골지역의 이름인 듯합니다. 예전 미국이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이었던 시절, 스페인이 플로리다를 점령하고 있을 당시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오비도라는 지역의 심볼이 특이합니다. 바로 ‘닭’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닭이라고 하면 ‘Chicken’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는 ‘Rooster’라고 말합니다. 이 지역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왜 오비도의 심볼이 닭인지는 잘 모릅니다. 한 가지 추측 가능한 것은 이 오비도 지역은 예전부터 야생에 방사시켜서 키우는 닭들이 많이 돌아다닙니다. 심지어 오비도 다운타운을 가 보면 은행이나 가게 주인들이 길고 넓은 판대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길고 넓은 판대기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거리를 돌아 다니는 닭들이 때지어 은행이나 가게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구약 성경 66권 가운데 닭이 등장하는 성경이 딱 한 군데가 있습니다. 바로 복음서에서 베드로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 닭이 유일무일하게 한 번 나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베드로와 닭을 연관시켜 베드로의 닭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미국 교회들 가운데, 특히 시골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교회의 종탑 위해 닭의 형상을 한 모형물이 풍향계와 함께 올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믿음의 선조들이 닭 울음 소리를 들으며 베드로의 회개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사는 이 지역의 상징물이 닭이 의미있어 보입니다. 현재 저는 우리교회의 이름을 변경하고자 고민중에 있습니다. 아마 ‘오비도제일장로교회’로 변경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지역에서 한인교회로써는 첫 장로교회이기에 지역이름과 함께 오비도제일장로교회로 변경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심볼도 바꾸고자 합니다. 바로 베드로의 닭을 상징화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을 회개와 한인 신앙 각성의 전초기지로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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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y 21, 2023 왜 광야를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다바르’라는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바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다바르라는 단어에 히브리어 전치사인 ‘민’이라는 말을 붙이면 ‘미드바르’라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전치사 ‘민’은 ‘~로부터’ 혹은 ‘~와 함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미드바르’는 ‘말씀으로부터’ 혹은 ‘말씀과 함께’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난 것은 히브리어 ‘미드바르’라는 말의 의미는 사실 ‘광야’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어의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왜 성경의 인물들이 광야의 삶을 살았냐라는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다가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의지 할 수 없는, 그 어느 누구도 함께 하지 않는 곳이 바로 광야, ‘미드바르’입니다. 다윗도 그가 왕이 되기 전 광야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도 공생의 사역을 광야의 삶을 시작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사용하는 종들을 반드시 광야로 내모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말씀이 함께 하는 그 곳에서, 말씀으로부터 오는 그 곳에서 그 분의 종의 모습으로 다듬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 그 광야에서 함께 하시길, 그곳에서 가장 좋은 것을 보게 되길, 그곳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게 되길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광야의 동행함을 통해 이기적이고 불순종만 저지르는 우리를 온유한 자로 다듬으십니다. 광야에서는 오직 말씀만이 보입니다. 광야에서는 오직 말씀만이 들립니다. 혹여 여러분의 삶 가운데 광야의 삶,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정말 복된 삶이 시작되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광야만이 우리를 말씀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께 이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구속주 하나님,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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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y 16, 2023 왜 교회는 성도의 어머니인가?
    오늘은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이 ‘어버이주일’ 혹은 ‘어머니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적 관점에서 주일예배를 특정한 예배 형태의 모임으로 모이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자칫 잘못된 예배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한 분 하나님께만 행하는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인간적 기념예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신앙일 수 있습니다. 설령 그러한 의도로 예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모임 자체로 불경스러운 것이 될 수 있기에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 행해지는 특정 예배의 형태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교회’에 대한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교회에 대해 말한다고 하면 ‘교회론’에 대해 떠올리는 경우가 일반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교회론’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주께서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고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교회를 떠올릴 때 먼저 장소적 개념으로 건물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교회론에서 말하는 교회란 믿는 자들의 무리(모임)를 교회라고도 하지만, 또한 유형적인 의미에서 건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성원, 즉 조직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 강요’를 쓴 칼빈은 교회를 일컬어 ‘성도들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성도들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가정의 어머니로부터 사랑과 양육, 여러 가지 성장에 필요한 동력들을 공급받으며 자라나는 것처럼 칼빈 역시도 교회가 성도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함은 믈론, 여러 가지 영, 육적인 것을 공급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그 어떤 천국의 값진 보화도 누릴 수도 없으며 주께로부터 오는 각종 좋은 은사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교회를 어머니로 여기며 사랑과 존경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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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30, 2023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믿는다’라는 말은 정의하기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사형인 ‘믿는다’라는 말이 명사형인 ‘믿음’으로 바뀔 때는 단순히 ‘믿는다’라는 의미를 넘어 확신을 전제로 하는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믿는다’라고 할 때는 그 믿음의 실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도 실체가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믿는 믿음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믿음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령 불신자들이 우상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미신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미신이 아니라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믿는 대상의 실체과 진실성에 기반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과연 불신자들은 그들이 믿는 우상이 가짜라고 인지하고 믿느냐라는 것입니다. 결코 그들이 믿는 우상을 가짜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세상 사람들의 믿음이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바로 그 믿음의 대상의 실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상을 믿는 이들의 믿음을 ‘신앙’이라고 말하기 보다 ‘미신’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실체하지 않는 것들을 자신들의 고집으로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잘 알지도 못한 것을 믿어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미신’이 세상 종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도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 말입니까?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신앙할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를 알지 못하면서 기도함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자비하셔서 우리의 잘 알지 못하고 그에게 나아게 기도할 때도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하지만 그것도 초보 단계의 믿음생활 때나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라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믿음도 자라가야 하되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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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9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23, 2023 신본주의인가, 인본주의인가?
    오늘날 교회는 인간 중심적 예배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유투브 영상을 보다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진 목사님의 로마서 설교 앞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로마서 1장 1절에 나타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바울이 자신을 향해 말한 ‘종’이라는 개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영상에서 이 목사님은 초대교회의 ‘종’의 개념을 일반적인 집안의 ‘일군’이라기 보다 ‘노예’라는 뜻임을 강조하며 노예의 특성을 들어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노예’로서의 낮은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인본주의적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이 사역하는 교회는 한국에서 보수주의 신학의 최고 선봉에 서 있다고 하는 교단의 목사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습니다.   왜 제가 이 설교를 인본주의적 설교라고 말씀드리냐면 로마서 1장 1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향해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종’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로마서 편지를 일면식도 없는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내면서 자신을 ‘종’으로 소개할 때는 자신의 겸손과 낮은 자세를 표현한다기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여러 방면으로 들었던 이들에게 바울이 누군가의 ‘종’, 즉 ‘노예’가 될 정도로 자신이 믿고 섬기는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기 위해서 ‘종’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노예’가 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정말로 위대하고 놀라우신 분이라는 것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하자마자 바로 2절에서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인들에게 바로 선포해야 신본주의 말씀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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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16, 2023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회개해야만 하는가?
    많은 이들이 어떤 집회, 가령 기도원에 가서 혹은 심령수련회에서 기도하는 시간에, 강사들의 초청을 듣게 됩니다. 기도 시간의 강사들은 어김없이 지난 날의 죄와 허물을 주 앞에 다 내어 놓고 회개의 기도를 강조합니다. 이런 부흥강사나 기도회 진행자들의 요청은 일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의 시간 때마다 지난 날의 죄에 대한 반복적 회개를 기도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과거 자신이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 지었던 여러 가지 추하고 더러운 죄를 다시 기억하면 용서해 주시길, 자신의 죄와 지난 날 과오를 씻어주시길 또 꺼내어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을 봅니다. 물론 이런 이들의 기도가 틀렸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지난 날의 죄와 허물을 참으로 회개하지 않고도 회개한 것처럼 뻔뻔스럽게 잊고 사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나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믿음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가지는 혼돈은 지난 날 회개한 죄들에 대해서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회개 기도를 해야 하는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아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지난 날 불순종의 죄인으로 살 때 지었던 죄와 예수를 믿지 않고 거부했던 반역을, 또한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과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순간 다 씻어집니다. 또한 나의 원죄뿐만 아니라 내가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지었던 자범죄도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다 사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원죄인 근원적인 죄, 즉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과에 대한 회개는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전되기 때문에 반복적인 회개를 요구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이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죄성에 의해 저지르게 되는 죄에 대한 회개는 날마다 우리는 기도라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 우리를 깨끗게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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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03, 2023 구약에서 말하는 복이란 정말 물질과 기복을 가리키는 것인가?
    누군가가 저에게 만약 무인도에 갇히게 된다면 그리고 그곳에 책을 딱 세가지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첫 번째는 ‘성경’이요. 두 번째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요. 마지막 세 번째는 서철원 박사의 ‘교의신학전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의 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을 때까지 품에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책의 내용을 토시하나 빼지 않고 다 외우고 싶은 간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기독교강요 제2권 10장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그리고 목회자들이 언제부턴가 기복적인 신앙관으로 그리고 현세주의 신앙생활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현상은 결국 강대상을 심하게 오염시켰으며 설교자들의 설교내용을 펠라기우스적 설교로 왜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대속과 그의 구속사역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인간의 도덕적인 삶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이 성경을, 신학을 진지하게 연구함 없다보니 쉽게 성경을 내 맘대로 해석하여 적용할 수 있는 QT에 빠졌으며 마치 QT가 진정한 성경해석인냥 교인들을 오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지면을 들어 감히 말씀드리건데, 신학과 성경의 역사적 배경없이 고안된 QT는 결국 사탄의 장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을 QT하면서 가장 큰 함정에 빠지는 것이 구약에 나타난 복의 개념입니다. 이 복의 개념은 특히 오늘날 현 신자들의 믿음의 척도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종교개혁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현세의 삶에 대한 즐거움에 제한시키지 않고 그들을 들어 올려 불멸에 대한 소망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진정한 복음설교는 기복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선포함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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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27, 2023 안식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개혁주의 신학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다시 읽어내려 가면서 오늘날 교회가 정말 많이 비뚤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비뚤어졌느냐고 묻는 분이 계신다면 조금의 망설임없이 어쩌면 우리는 다시 돌이키지 못할지 모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과연 몇 분이나 제 말에 동의를 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는 오늘날 교회의 타락과 변질, 비뚤어짐은 이제는 더 이상 참과 거짓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시기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에 쌓이게 합니다.   얼마전부터 메시아닉 쥬(예수를 믿는 유대인들)들이 다시 그리스도교(기독교)에 관심을 받으면서 한국은 물론 세계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세대주의 신학을 바탕으로한 왜곡된 신학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한 때는 이 신학사상에 빠진 적이 있는 터라 이 사상의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재 개혁신학을 Replacement Theology라고 말하며 예수님 승천 후 세워진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는 잘못된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편이라 처음 이 신학사상에 대해 접했을 때 뭔가 새로운 신학이론인가 하여 그들의 사상을 추종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이 주장하는 구약의 여러 절기와 안식일 개념이 이 땅에 참된 우리의 구속주로 오신 예수님과 충돌된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부한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과 칼빈주의 신학이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일일이 다 언급하기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그때 그때 생각 날 때마다 하나하나 풀어가려 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안식일의 개념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를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다시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주일의 개념이 성경에 근거도 없는 안식일로 둔갑하여 참된 안식일과 안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지를 또한 참된 안식을 지키고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작금의 교회는 가르쳐주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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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19, 2023 예수를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목회자의 삶을 살고 교회에서 목회자로 사역하면서 지금까지 가장 저를 두렵게 하는 것이 내가 가르치는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신인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신자들은 물론, 목회자 역시도 누군가가 교회에 나와 있기만 하면 구원받았다고 믿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목회자는 그런 망상을 신앙으로 바꾸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어렵게 교회를 나온 자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할 때는 반드시 전제가 필요합니다. 바로 당신이 죄인입니다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져야 하고 그렇기에 지옥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도 다 차치하더라도 자신들이 교회에 나와서 어느 시간이 흐르면 예수를 믿고 있다고 착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신을 믿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신을 믿고 있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지, 예수신을 믿고 있는지는 그가 예수에 대해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내가 내 맘대로 생각하고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엄연히 우리의 신앙의 표준인 성경을 중심으로 믿음생활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삶을 어떻게 선하게 살지를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진리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말씀을 듣는 자들 가운데 유기된 자들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이 땅에서 복음을 듣지 못했노라고 핑계대지 못하게 해야 함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며 마음이 많이 쓰라립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신앙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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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17, 2023 켄터키 에즈베리대학 부흥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지금 한창 뜨겁게 미 기독교계 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들이 주목하고 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몇 주전부터 일어난 미 켄터키 지역의 에즈베리대학에서 시작된 부흥이라는 내용입니다. 2023년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시작된 채플에서 찬양과 기도가 끊기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부흥이 시작되었다고 떠들어 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미 전역에서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자 켄터키 에즈베리대학의 채플 예배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주 한인교회의 한 목사님은 그 현장을 직접 찾아 그 부흥의 열기를 느끼고자 자신의 휴무일을 이용하면서까지 그곳을 방문했다는 유투브 영상까지 만들어 올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다들 미쳤습니다. 현재 켄터키 에즈베리대학에서 일어난 일은 기독교의 부흥이 아니라 지난 3년간 코로나로 인해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감정폭발에 불과합니다. 많은 이들이 현재 에즈베리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성령의 임재로 인한 새로운 부흥의 물결이라고 말합니다. 다들 헛소리입니다. 정말 이것이 진정한 성령의 부흥이라고 말한다면 말씀선포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로 인해 회개가 일어나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부흥 현장에 있는 이들 가운데 말씀을 듣고 은혜받고 회개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저 하루 종일 찬양과 기도를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찬양을 하고 싶어서 모여든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부흥은 노래 부르고 싶어서 노래방에 찾아 모인 이들이 만들어낸 흥분이 아닙니다.   또한 에즈베리 부흥이 진정한 성령 하나님의 부흥이 되려면 동성애자가 찬양을 인도하므로 은혜받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곳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안이 열려 그 동성애자가 회개하고 변하는 일이 일어남이 마땅함일 것입니다. 지금 에즈베리 현상은 또 다른 영적 암울함과 어둔 세력들의 한낮 장난질에 불과할 뿐입니다. 절대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흥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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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11, 2023 예수 믿어야 천국갑니다.
    오늘날 교회는 트랜드화되어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자신들의 교회의 특성을 드러내고 자랑하므로 교인들을 모으는 전략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잘 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이고 또한 이런 교회가 지역사회에 특징을 드러내면 성장을 하곤 합니다. 그렇다보니 교회의 목회자들도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적 사역이 아니라 교회를 운영하는 CEO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각 교회가 목회자 청빙을 할 때도 목사의 메시지에 주목하기 보다 그 목사가 어떻게 교회를 잘 성장시키고 교회를 잘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더 살피게 됩니다. 또한 각 교회는 서로 경쟁을 하듯 내 교회와 이웃교회의 차별을 두어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잡화점을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정말 위험천만한 생각입니다. 제가 귀가 따갑도록 외치고 있는 것이지만 교회는 Costco나 Walmart와 같은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내가 선택해서 가는 상품점이 아닙니다. 내 모습과 품위에 맞는 명품 가방을 구입하고자 쇼핑하는 쇼핑센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죽음을 면하고 영원한 삶을 얻고자 생명의 말씀을 들으러 가야만 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한 주간 지친 내 영혼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면 우리는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들의 죄악상을 깊이 드러내고 그 죄로부터 해결받는 방법과 영원한 진노 아래 처해진 사망과 고통의 죽음을 벗어나는 방법을 얻고자 찾아 나서야 하는 곳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굳이 교회를 찾아 매주일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미신적인 종교생활을 할 바에 차라리 절간을 찾아 공을 드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제발 종교생활에서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예수를 참된 나의 구세주로 모시고 참된 구원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 예수를 바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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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27, 2023 당신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아십니까?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한탄을 기록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 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뜻이거니라고 생각하고 억지로(?) 넘깁니다. 실질적으로 내게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난 성경의 인물보다도 더 심한 갈등과 원망속에서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바로 욥기와 요나서의 이야기입니다.   욥기서의 이야기야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내 삶에 고통스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욥의 불평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이 그래도 우리보다 낫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속에 속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질문은 왜 인생의 고난이 내게 불어닥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지도 않으신 채 당신이 누구신지만 장황하게 설명하시고 감히 나에게 너의 고통을 따지느냐로 말씀하십니다.   욥의 이야기와는 다른 측면이 있지만, 요나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게 싫다는 일은 억지로 시켜놓고 결국 그 일을 하게 하심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요나의 작은 불평이 오히려 그의 인격에 문제인 것처럼 요나서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원치 않는 고난과 우리 삶의 불편을 불평할 수 없는 것이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젊었을 적 그 혈기넘침으로 자신의 일이 아닌 고통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 할 때는 철저하게 도망자의 삶을 살게 하시다가 모든 꿈과 희망도 다 잃고 포기하고 있을 때 그것도 할 수 있는 능력과 젊음이 다 지난 시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일군으로 다시 세우십니까? 모세의 입장으로써는 그가 주님을 만난 첫 만남에서 거절한 이유가 충분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늘 이런 식이실까요? 도저히 그 답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답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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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20, 2023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며칠 전 유투브영상에서 한 목사님의 설교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제가 추구하는 설교내용을 선포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들의 심각한 문제가 교회에 나와 있는 교인들을 볼 때, 구원받았음을 전제로 하고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가 구원받은 이후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99.999%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과 신자들의 도덕성 문제를 보고서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과연 저렇게 사는 것이 맞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회내의 신자들끼리도 구원받은 자들이 그렇게 행동해도 되는 것이냐고 반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교회내의 신자들의 문제들에 대해 그 원인을 그 영상의 목사님이 말씀하십니다. 애초에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기에 그런 일들을 교회를 다니면서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저는 100%공감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 있기만 하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의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교회내에서 목사로 장로로 직분자로 세워졌음에도 자신들이 일으키는 반기독교적, 도덕적 문제의 심각성을 모릅니다. 죄를 짓고도 죄를 지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교회가 나락으로 떨어졌을까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는 기독교가 왜 그렇게 변질되었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1960년대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교회 내부적으로 문턱을 낮추는 교회,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교회 등등, 교세의 확장을 위해 복음을 간단하게 조작하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과 교회관이 아닌 세상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교회와 복음으로 변질시키면서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제 기억만해도 어렸을 때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으면 심각한 영적 통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참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나길 간절히 기도한 적이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교회는 이런 영적인 몸부림은 둘째치고 신자들이 구원을 얻는 과정(구원의 서정)을 아예 통째로 버려버렸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구원받았는지도 받지 못했는지도 모르는 상황속에서 기복적이고 신비적인 신앙으로 믿음생활하면서 그것을 구원받은 것으로, 영생을 얻은 것으로 착각하며 불법을 저지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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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13, 2023 당신은 정말 신앙에 관심이 있습니까?
    최근들어 하루에도 몇 십번씩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 가운데 몇 퍼센트나 참된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을 믿음으로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스스로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 이유가, 지금 이 시간, 예배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가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상 이방종교와 다를 바 없이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들과 현재 우리 삶의 현실적 문제는 서로 같이 할 수 없는 경계선이 있는 것 같습다. 마치 성경과 삶이 서로 다른 평행선을 그리듯 각자의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보니 성경의 하나님과 나의 삶의 문제의 교차점을 찾고자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교회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근데, 사실 오늘날 교회가 기복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신앙은 종말론 가운데 후천년설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초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종말론은 무천년설이 중심이었습니다. 개혁주의가 믿고 고백하는 종말론이 바로 무천년설입니다. 하지만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세대주의 종말론에 영향으로 여기 저기서성경의 종말론 사상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후천년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후천년설이란 예수님의 재림과 그분의 통치가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이 이 땅에서 기독교의 번영과 황금기를 누린 후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을 근거로 해서 예수가 영적 통치하는 현 시대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며 그렇기에 교회와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번성하고 번영을 누리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교회는 현실에서 잘됨인 번영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주장의 대표적 인물인 바로 두 조씨 목사님들(고 조용기 목사 및 Joel Osteen)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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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05, 2023 개혁주의 종말론에 대해 바로 알기
    언제부턴가 한국 기독교가 이스라엘에 대한 시각이 혼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근들어 기독교 신자들이 현 이스라엘인 민족적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대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장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전문 방송채널이라고 하는 유투브 ‘Brad TV’에서는 주님이 오시기 전 역사적 이스라엘이 다시 주님께로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와 선교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한 때는 이런 내용에 심취해서 민족적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이 역사적 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스라엘을 봐야 주님 오실 때를 알 수 있다고 설교까지 하곤 했습니다.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위험천만한 일을 한 것이나 다름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현재 기독교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 회복과 관심은 그 뿌리가 세대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대주의 신학은 19세기와 20세가 초 개혁주의 교회들이 이단으로 지정한 신학사상입니다.   하지만 이 세대주의 운동이 신비주의 운동과 성령운동의 연합으로 다시 기독교 신자들에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욱이 1948년 이스라엘 나라가 역사적으로 다시 회복되면서 세대주의가 주장하던 주장이 더 힘을 얻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기독교는 정통 기독교 진리가 무너지고 이단 사이비 사상이 너무 많이 침투되어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기독교가 오랜 시간 가르치고 지켜오던 ‘개혁주의 종말론’에 대한 관심과 교육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천년왕국도 사실은 지금이 바로 주님이 영적으로 통치하는 천년왕국임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미 구약과 신약의 일부에서 예언된 모든 예언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어 졌음을 알고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므로 발생되는 심각한 오류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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